튀니지
북아프리카에 있는 국가 - 지도 보여주면서
주변 국가로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의 남서쪽, 사르데냐의 남쪽에 위치 서쪽으로는 알제리, 남동쪽으로는 리비아와 국경을 접하고있다.
1956년 3월 20일에 프랑스로부터 독립.
튀니지는 헌법에서 종교가 이슬람교임을 명시적으로 밝힌 이슬람교 국가이다.
튀니지의 국가명은 동북부에 위치한 수도 튀니스로부터 유래.
국토의 40퍼센트가 사하라 사막. 나머지지역은 1300키로의 해안선과 그 인근의 비옥한 토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비옥한 지역은 고대부터 좋은 땅으로 알려져 있어 페니키아인들이 설립한 카르타고가 이곳에 있고,
로마제국 시대에는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로서 빵바구니라는 별칭으로 불릴만큼 곡창지대로 유명.
이후 5세기에는 반달족, 6세기에는 비잔틴제국, 8세기부터는 아랍족의 지배를 받았다.
1881년부터 7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았다.
튀니지는 세계 경제 포럼이 발표한 보고서에 있어 아랍과 아프리카 나라들사이에서 높은 위치를 랭크.
경기도 인구(1200만)보다는 적고 서울특별시(1040만명)와 비슷한 수준의 인구가 튀니지에 살고 있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교역거점으로 이 땅에 이주. 기원전 814년경에는 카르타고가 건국.
카르타고는 전쟁에 패배해 기원전 146년에 멸망. 로마 지배 하의 아프리카 속령이 됨.
로마시대
로마 지배 하에서는 일류 속성으로 로마화가 진행되어 기독교로 전래되었다.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 이후, 서로마 제국의 관할. 게르만계 반달족이 439년 침입. 카르타고에 반달 왕국을 세움.
반달왕국은 해상무역으로 번영, 534년에 비잔티움 제국에 멸망, 동로마 제국에 포함.
이슬람 시대
7세기에는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세력을 모은 아랍인이 동방에서 침입. 베르베르인 가히나 여왕과 동모라 제국의 연합군을 격파.
아프리카를 이슬람 세계에 편입시켰다. 이프리키야로 자리매김한 튀니지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섬기는 형태로
카이르완의 아글라브 왕조가 성립. 아글라브 왕조의 쇠토 후 반아바스를 내건 이스마일파의 파티마왕조가 이 땅에서 흥하여,
아글라브 왕조를 멸망시킴. 파티마 왕조의 쇠퇴 이후 카이르완은 지리드 왕조가 번창.
아글라브 왕조의 쇠퇴 후 반아바스를 내건 이스마일파의 파티마 왕조가 이 땅에서 흥함. 아글라브 왕조 멸망.
파티마 왕조의 쇠퇴 이후 카이르완은 지리드 왕조가 번창했다. 무와히드 왕조의 지배를 받은 후 1229년에 튀니지에 하프스 왕조가 성립.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의 속국이 된 후, 1574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
1705년 튀니지에는 후세인 왕조가 성립.
후세인 왕조는 프랑스 지배를 사이에 두고 252년에 걸쳐 지배하였다. 1873년에 즉위 했던 아흐메드 베이 시대에 시작된
서유럽 정책과 부국강병책에 튀니지는 근대화가 서구화 정책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정책을 시행. 하이루딩 파샤등의 활약으로
1861년 헌법이 제정.사독 베이는 이슬람 세계및 아프리카 최초의 입헌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보수파의 저항으로
1864년 헌법은 정지되고 근대화, 서구화 정책은 좌절되었다. 1869년 서구화 정책의 부담으로 재정이 파탄.
1878
프랑스 식민지가 된 배경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진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 영토 처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튀니지를 프랑스의 영향권에 넣기로 한다. 이에 프랑스는 튀니지를 평화적으로 점령하고자 후세인 조와 협상하지만 당연히 될 리 없고
침략할 구실을 찾던 와중에 1881년 튀니지와 알제리 변경의 한 부족이 알제리를 약탈한 것을 빌미로 군대를 튀니지로 진격시켜
바르도 조약을 맺어 군사권과 외교권을 뺏고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만든다. (이 때는 이미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시절)
2008년에 뉴욕타임즈에서 튀니지를 가볼 만한 곳 3위에 올렸다.
국토의 60%를 차지하는 사하라 사막 덕분에 자연스럽게 관광과 휴양지가 발달.
99%의 인구가 이슬람교.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비교적 온건한 수니파가 대부분. 종교적인 규율이 느슨.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프랑스식 문화와 아랍식 문화가 섞여 특이한 문화적 다양성을 띠는 곳.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는 북아프리카의 파리라 불릴만큼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매우 서구적.
오랜 토착민은 베르베르족이고 예전 카르타고의 주민은 대부분 페니키아인. 로마의 지배 아래에 로마인에게 동화,
프랑스의 지배 하에서는 프랑스인에게 동화.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튀니지인들은 아립인이 아닌것이다. 이런 이런 묘한 정체성 때문에
튀니지가 가진 자연의 축복은 3s이다. Sand, Sun, sea. 사하라사막, 이글거리는 태양, 지주해 해변이다.
유럽인들은 날씨 좋은 여름철 지중해 기후를 즐기기 위해 상당수의 관광객이 튀니지를 방문.
튀니지는 이슬람권 나라이지만 법으로 일부일처제를 못박았다. 프랑스의 지배아래 있었던 탓에 프랑스식 남녀 평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제공해주는 등 여성의 인권과 사회생활에 제약이 덜하다.
튀니지는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 나라(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중에서 제일 작은 나라지만 가장 개방적인 나라이다.
대다수의 튀니지인들은 자신들이 유럽의 일부라고 까지 생각한다.
평화의 갈망 지투나 모스크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의 가장 유명한 역사적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유명 관광지
시디 부 사이드, 고대 카르타고, 로마의 유적지 카이로우안 이슬람 사원 엘젬 원형 경기장
튀니지.
소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배경.(항상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동영상.
튀니지가 다른 아랍권 국가와 다른점.
이슬람권에서 행해지는 일부다처제가 법으로 금지되었다.
프랑스식 남녀평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제공해주는 등 여성의 인권과 사회생활에 제약이 덜해
여성들에게는 맘 편히 숨 쉴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나라이다.
마그레브 나라중 제일 작은 나라지만 가장 개방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튀니지는 아랍권에 속하는 나라지만 여성들이 얼굴을 온통 감싸는 검은 부르카의 모습을 거의 볼 수 ㅇ벗고
대개 히잡으로 머리만 가린다. 그래서 온몸을 검은 천으로 싼 아랍 여성의 전통 옷차림을 보기가 힘들다.
최고의 휴양지이다.
~~~ 각 도시들 소개.
휴양하기 좋은 나라.
끝.
비제르트
튀니스에서 약 70km정도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로 도시 안에 운하가 있어 특유의 운치가 있는 곳이다.
처음에는 페니키아의 군사 전초기지로 세워졌고 1535~1572년까지는 스페인에 점령 당하기도 했다.
지중해로 연결되는 중요한 지역이다.
항구도시라서 그런지 자유로움과 넉넉함이 있다. 비제르트에는 시민들이 청바지를 입고 있는 튀니지 여성들도 볼 수 있다.
일부 아랍 원리주의자들은 여자가 바지를 입으면 율법을 어긴 것이라 생각하고 태형 등의 처벌을 하고 아프리카 케냐, 탄자니아 같은 경우는
바지를 입은 여성을 창녀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이러한 나라들에 비하면 튀니지가 무척 자유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비제르트는 1861년 프랑스 점령기에는 지중해, 북아프리카 지역의 주요한 프랑스 해군기지가 되었고,
제 1,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제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장군도 이곳을 전략적 중심지로 생각했고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튀니지가 독립한 후에도
프랑스군이 이곳에 주둔했다가 1963년에 비로소 반환했다.
세계대전 종식후 1954년 나중에 초대 대통령이 되는 튀니지의 하비브 부르기바가 피에르 맹데스 프랑스 총리와 협상을 시작했고,
이듬해 4월 그는 에드가 포레 총리와의 협상 과정에서 외교, 국방을 제외한 자치권의 획득했다.
1956년 3월 20일 튀니지의 독립은 공식 승인되었고, 이듬해에 비제르트를 제외한 튀니지전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협정 원칙이 합의되었다.
1961년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은 독립 협정에 따라 비제르트의 프랑스 육해군 기지 철군이 관철되지 않자 군사공격을 명령했고
2년에 걸쳐 양측이 천여 명의 인명손상을 입은 끝에 프랑스 군이 철군했다. 제국주의의 한 단면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도
튀니지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프랑스를 동경하면서 살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밖에 없다.
석양이 아름다운 유적지 두가.
튀니스에서 남서쪽으로 105km 떨어져 있는 두가는 로마시대 유적지로 남부의 스페이틀라 유적과 함께 가장 크고 잘 보존된 로마 유적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곳은 초기부터 카르타고 영토 한가운데 위치한 군사 요충지가 되었고,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들어오면서 투가에서 두가로 이름이 바뀌어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중세 반달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어 유적지로 남게 되었다.
두가에는 로마의 유적지가 많은데 유네스코 지정 표지석과 원형극장을 만날 수 있다. 188년애 건설되었다. 3천 5백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굉장히 크다.특이한 점은 원형 극장 옆의 조각상에 머리가 없다는 것이다. 전쟁의 전리품으로 유물을 가져갈 때 머리부분만 잘라서 본국으로 가져가는데,
많은 조각상의 두상이 프랑스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두가에는 12개의 크고 작은 신전이 있다.